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글로스터 곶 전투 (문단 편집) == 경과 == 미군과 호주군의 가장 중요한 전술 목표는 첫 번째가 글로스터 곶의 비행장을 점령하는 것이었으며, 두 번째가 뉴 브리튼 섬과 뉴기니 섬 사이를 가르는 해역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었다. 해병 제1사단이 상륙하기 앞서서, 미군은 1943년 12월 15일 섬 남쪽의 '아라웨'에 제112기병연대를 상륙시켜 섬 동쪽 끝에 위치해 있는 라바울로부터의 보급과 일본군의 퇴로를 끊고, 이어 12월 26일 윌리엄 H. 루퍼투스 소장의 지휘 하에 해병 제1사단이 글로스터 곶에 상륙했다. 한편 해병 제1사단은 글로스터 곶에 주력 부대를 상륙시킴과 동시에 일본군의 퇴로를 끊기 위해 섬 서쪽의 타우알리 해변에 제1연대 2대대[* [[HBO]] 제작 미니시리즈 [[더 퍼시픽]]에서 주연 등장인물 [[로버트 레키]]가 속한 부대가 바로 여기이다.]를 상륙시켰다. 상륙작전은 대규모 항공폭격과 해군의 상륙준비포격의 지원 덕에 상당히 순조로웠고, 상륙한 미군은 처음에 해변 근처에서는 일본군의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일본군이 상당히 소극적인 저항을 하면서 라바울 쪽으로 계속 조금씩 후퇴하였기 때문이었다. 대신 미군은 지옥과도 같은 정글과 싸워야 했다. 일본군은 정글 속에서 숨어서 미군을 기습하는 등의 전술을 사용하면서 미군을 괴롭혔지만, 미군은 차근차근 전진하며 나아갔다. 아라웨에 미군이 처음 상륙하던 때에 일본군은 라바울에서 항공기를 날려 보내 미군을 방해하려고 했다. 교두보가 취약했던 당시의 미군 상륙병력들에겐 일본군의 항공공격이 어느 정도 위협이 되었으나, 미 해병 1사단이 상륙하고 난 바로 다음날인 27일부터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 방면의 미군 항공전력들이 라바울을 집중 폭격하자 일본군 항공전력은 라바울 상공을 지키기에 급급해졌고, 결국 상륙한 미군들에게 의미있는 반격을 할 수 없었다. 미군은 글로스터 곶에 상륙한 지 일주일도 채 되기 전에 비행장을 점령했다. 그 다음달인 1944년 1월 중순에 이르면 마츠다 준장이 이끄는 일본군 부대의 저항을 완전히 물리쳤다. 이후 미군은 차근차근 진격을 하면서 일본군을 동쪽으로 밀어냈고, 라바울의 일본군 본영에서는 미군의 추가적인 진격을 막으려 애썼지만, 이 와중에 태평양 전선에는 라바울과 뉴브리튼의 운명을 결정지을 큰 전략적 변화가 일어났다. 1943년 11월의 [[타라와 전투|길버트 제도 침공]]을 시작으로 '''미 해군의 진짜 주력이 중부 태평양을 돌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44년 2월에 먀셜제도가 사실상 미군 손에 떨어졌다. 그 직후, [[헤일스톤 작전|미군이 '''라바울의 후방이자 일본군 연합함대 사령부가 있던 트럭 섬에 대규모 폭격'''을 실행하여 약 20만 톤 이상의 함선과 수백대의 항공기들을 날려 버렸다.]](1944년 2월 17일~18일) --진주만에 되로 주고 말로 받은 트럭 섬--[* 일본 수상함대의 주력들은 공격 직전에 도주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후 미군의 위세에 눌려서 [[필리핀 해 해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미군에게 등을 보이며 도망가면서 소극적인 대응만 하기에 바빴다.] 라바울의 항공전력은 [[과달카날 전역]] 이후 1943년 중반부터 시작된 솔로몬 제도에서의 미군 진공에 맞서면서 점점 약체화 되고 있었다. 이미 1943년 3월경에 일본 육군항공대가 라바울에서 모두 철수[* 일본 육군은 솔로몬 제도보다 뉴기니 전선을 더 중요시했는데, [[비스마르크해 해전]]으로 인해 뉴기니 방어에 비상이 걸리자, 라바울과 솔로몬 제도에 전개한 항공전력을 하나도 남김없이 뉴기니 전선으로 재배치했다.]하면서 전력이 반토막 난 뒤로, 그때 그때 필요한 전력을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항공전력까지 동원해 [[돌려막기]][* 이 당시 일본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과달카날 전역]]의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항공기 및 조종사, 승무원들을 대거 손실한 뒤로 실전에 나서지 않고 후방에서 항공모함 작전을 위한 조종사 양성을 하면서 항공전력을 재건하고 있었지만, 일선 지상기지 지원에 항공기와 조종사들이 계속 차출되면서 훈련을 못하고 손실이 생기면서 전력 재건은 더뎌지기만 했다. 이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크게 패하는 단초가 된다.] 하면서 버티던 상황이었다. 라바울과 가까운 곳에 생겨난 미군의 전진기지에서 전투기들이 출격하여 폭격기들을 호위하기 시작한 1943년 10월경부터는 미군의 공습이 매일같이 이어지면서 라바울의 제공권 유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8월에 뉴 브리튼 섬으로부터 남쪽 솔로몬 해 해상의 키리위나 섬에 미군 비행장이 들어서고, 그로부터 1달여 뒤에 최신기종으로 장비한 전투기 부대가 배치되자 뉴기니 방면의 미군 항공 전력들이 본격적으로 라바울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11월에는 솔로몬 제도 일대의 일본군 전진기지가 있던 부건빌 섬에 [[부건빌 전역]]이 시작되어 미군이 상륙했으며, 글로스터곶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2월 말에는 이 부겐빌섬 교두보에 들어선 비행장에 전투기 부대가 배치되자 솔로몬 제도 방면의 미군 항공전력들도 라바울 때리기에 가세하였다. 중간중간에 미 해군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기습도 이어졌다. 이런 판에 '''후방기지인 트럭이 박살나자 라바울의 항공전력을 유지할 여력이 사라져 버렸다.''' 결국, 트럭섬이 박살난 바로 다음날에 그나마 남아있던 해군항공대 전력마저 모두 트럭 섬으로 철수해 버렸고(1944년 2월 19일)[* 이 때 항공기와 조종사들은 라바울을 떠났지만 항공기 정비요원들은 불안정한 제공권과 제해권 때문에 철수하지 못했다. 이들은 전쟁 초기부터 활약하던 베테랑 정비사들이었는데 이들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전쟁 후반기 일본 해군항공대의 질적 저하가 두드러지는 원인이 되었다.], 뉴브리튼을 비롯하여 그때까지 솔로몬 제도 일대에서 버티던 일본군은 항공지원도 없이 싸워야 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방공망이 사라지면서 라바울에 일본군 수상함이 들어오는 것도 완전히 불가능해졌으므로 이 때를 기점으로 '''라바울 및 솔로몬 제도의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보급이 사실상 끊겨버렸다.'''[* 1944년 2월 20일에 구축함 2척이 라바울과 인근 지역에 보급을 수행한 것이 마지막이었다.이후 종전때까지 잠수함이 가끔 왔을 뿐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정상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라바울의 일본군 본영은 섬 서부 방어를 맡고 있던 일본군 17사단에게 라바울로 퇴각할 것을 명령하였다. 마츠다 준장의 부대는 자신들의 상급 제대인 일본군 17사단에 합류하기 위해 라바울 방면으로 퇴각하고, 미군은 마츠다 부대를 포위 섬멸하기 위하여 섬 중북부의 '윌로메즈 반도'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따라잡으려 했으나 윌로메즈 반도의 일본군 수비대가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3월말까지 마츠다 부대와 윌로메즈 반도의 수비대를 비롯해 뉴브리튼섬 서부 및 주변 도서 지역에 깔려있던 병력들을 수습한 일본군 17사단은 윌로메즈 반도와 라바울 사이의 주요 거점에 소수의 후위병력만 남겨두고 라바울로 철수했다. 그리하여, 1944년 3월 말 경 미군은 글로스터 곶에서 윌로메즈 반도에 이르는 뉴 브리튼 섬의 서쪽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한편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자, 중부 태평양의 섬들을 하루 빨리 확보하고 일본 본토를 공격해야 하는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상륙전 및 정글에서의 전투 경험이 풍부한 해병 제1사단이 매우 필요해졌다. 해병 제1사단을 휘하에 넣고 있었던 남서태평양해역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다른 상륙 작전을 핑계로 니미츠에게 해병대를 넘기지 않으려 했지만 합동참모본부는 남서태평양해역군에게 향후 뉴 브리튼 섬의 공격은 최소한의 병력으로만 수행할 것을 명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해병 1사단의 철수를 차일피일 미뤘지만, 이 모습에 열받은 어네스트 킹 제독이 미 육군의 최고 수장인 조지 마셜 장군에게 직접 따졌고, 결국 해병 제1사단은 태평양해역군으로 배속이 변경되어 재정비를 위해 파부부로 떠나게 되었다. 약 4개월 간에 걸친 글로스터 곶 전투는 이로써 종료되었고, 1944년 5월부터 과달카날에서 대기 중이던 육군 제40사단이 파견되어 전선을 담당하였다. 육군 제40사단은 뉴브리튼 섬의 중부지역을 계속 공략하다가, 1944년 11월 [[필리핀 탈환전]]에 참가하기 위해 호주군 제5사단과 교대한다. 호주군 또한 꾸준하게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종전 즈음에는 라바울에서 직선거리로 약 50~60마일 거리까지 도달하여 섬의 동쪽 지역으로 일본군을 밀어붙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